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작가인 그는 한 해에도 몇 권씩 책을 내는, 말 그대로 괴물작가가 아닌가 싶다.
무릇 추리소설이라면 사건의 전말부터 등장인물, 그들간의 서사, 증거 물품, 수사에 혼선을 주는 요소들까지...
비전문가인 내가 생각해도 꽤나 많은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마치 이야기 주머니를 몸에 달고 있는 것처럼
뚝딱 1년에 몇 권씩 소설을 집필해내니, 추리소설계의 대가이자 요즘 말로는 추리소설계의 AI가 아닐까 싶다.
다만 이번에 출간된, <장미와 나이프>는 신간 소설은 아니고, 10년 전 출간했던 <탐정클럽>이라는 소설을 개정했다고 한다.
개정판에서 책 제목을 바꾸게 된 이유는 아마도 독자의 기대를 끌어올려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사실 <탐정클럽>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번 단편선은 탐정클럽이라는 조직의 사람들이 등장하겠구나'하는 예상을 하게 만들지만
<장미와 나이프>라는 오묘한 조합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책 제목의 의미를 유추하게끔 만들어주는 흥미 요소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기대감으로 책을 여는, 추리소설 애호가로선 책 제목을 바꾼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장미와 나이프>는 총 5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있는데,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회원제 기관 '탐정클럽'이 의뢰받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첫 번째, <위장의 밤>은 가족기업의 대표로 권력의 정점의 서 있던 사장의 자살사건을 두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이를 며칠만이라도 숨기려는 이들의 공작 속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내용이다.
가족기업의 뚜렷한 단점으로, 아무리 우수한 성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혈연을 이길 수 없다는 명제 하에 우선순위에서 밀린 이들: 재혼한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의 남편(사위), 그리고 사장과 삼혼한 여성과 (그녀와 몰래 교제 중인) 비서는 직계가족에게 모든 유산이 돌아갈 것을 우려해, 사장의 시체가 발견되는 시점을 늦출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짠다.
똑똑한 두 남성 덕분인지, 알리바이까지 완벽하게 만들어나가는 듯 싶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며칠간 사장을 실종 상태로 유지하려다 정말로 시체가 사라지며, 실종사건으로 경찰이 개입하게 된다.
게다가 재혼한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이 전부터 아버지가 이용해오던 서비스가 있다며, VIP 전문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하게 된다.
양옆에서 조여오는 수사망에 가까스로 짜낸 시나리오의 전말이 점점 밝혀지는데, 그럼 시체를 숨긴 진짜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진범을 밝혀낸 탐정클럽은 진실이 담긴 서류를 용의자 중 한 명에게 건네고... 그는 이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할 지 고민하게 된다.
두 번째, <덫의 내부>는 부동산과 사채업으로 부를 누적한 남성이 그가 자식처럼 키운 조카의 결혼상대와 인사 겸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면서 가족들을 초대한 가운데, 심장마비로 죽은 채 발견된다.
평소 가족들에게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어주며 살았다지만, 돈에 얽힌 불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바람기가 있는 남편을 둔 아내, 사업차 큰 돈을 빌린 여동생과 그의 남편, 그리고 돈을 빌리기 위해 찾아왔지만 거절당한 처제와 그의 남편. (사랑으로 키워온 조카는 삼촌과 얽힌 채무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 중 누가 심장마비로 사인을 꾸며, 그를 죽게 만든 것일까?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가꾸던 가정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남은 가족들에게 '왜?"라는 의문점을 남기게 된다.
이를 밝히고자 아내는 평소 남편이 이용하던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하게 되고, 죽음 뒤 숨겨진 진상을 밝히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 진상은 다소 충격적이다. 인물간 배신에 배신이 이어지는 구조이다.
아내 대신 호스티스를 사랑한 남편, 남편 대신 젊은 조카를 사랑한 아내, 그리고 이젠 숙모를 버리고 새 가정을 꾸리려는 조카.
그들 사이에 정상적인 애정관계를 가진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그 비뚤어진 애정이 서로를 위협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 번째, <의뢰인의 딸>은 자신이 받은 상처보다 가족이 받을 상처를 보듬어주려는 가족애가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하교한 둘째 딸은 이 시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아빠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의 망연자실한 모습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가 사망한 엄마의 주검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마주한 풍경에 대해 꼽씹으며 아빠가 벌인 일은 아닐까 의심하지만
아빠를 비롯해 언니, 이모까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평소 아빠가 이용하던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한다.
(둘째 딸은 친구를 통해, 아빠가 경찰에 진술한 내용과 달리 훨씬 이른 시각에 혼자서 집 근처에 있었단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진상은 현실적이지만, 참으로 처절했다.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수강하던 엄마는 지인을 통해 유화 강사를 만나게 되고, 늦깎이 사랑에 빠진 둘은 사랑의 도피를 꿈꾼다.
그러나 이 결심은 곧 들통나고, 아빠부터 이모, 큰 딸까지 가세하며 가정의 평화를 지키려고 하지만...
비극적 결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결과에 대해 셋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둘째 딸을 위해 모든 진상을 감추기로 한다.
네 번째, <탐정 활용법>은 아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두 동창생의 교묘한 알리바이를 파헤쳐가는 사건이다.
골프치기 좋은 명소로 알려진 근교의 한 호텔, 로비로 걸려온 한 여성의 전화와 비명소리에서 사건이 시작된다.
급하게 올라간 호텔 방에는 이미 사망한 한 명의 남성, 그리고 방금 전까지 괴로워하다가 사망한 남성과 충격에 소리지르는 여성. 총 3명의 인물이 발견된다.
이들의 관계는 대학 동창생이었던 아내들로 연결된, 친한 부부 사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명의 아내를 제외하고, 셋이서 호텔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 의문을 낳게 된다.
알고 보니 참석하지 않은 아내는 자신의 남편과 동창생인 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사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이를 상대방 남편에게 알렸는데, 이에 분노한 상대방 남편이 불륜남녀를 죽음으로 응징하려다 독약을 탄 잔이 바뀌는 바람에 본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탐정클럽의 조사 결과, 두 아내는 모두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꿈꾸고 있었고,
사망보험금까지 야무지게 타낼 생각으로 이 모든 사건을 계획했고, 실행에 옮긴 것임을 밝혀내게 된다.
다섯번째, <장미와 나이프>는 지금까지 에피소드 중 가장 비뚤어진 사랑에 얽힌 사건이었다.
이야기는 세상에 이름은 날리는 저명한 교수이지만, 그에게 가족에 대한 운까지 따르지는 못했던 모양인지
초혼한 아내, 재혼한 아내까지 모두 잃고, 거둔 두 딸아이 중 둘째 딸의 예상치 못한 임신을 알게 되며 시작한다.
정재계 가문과 혼인을 통해 교수직에서 학장, 그 이상까지 꿈꾸었던 아버지는 둘째 딸에게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고, 뱃 속의 아이를 지울 것을 명하지만 둘째 딸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교수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기 위해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하는데, 이후 의외의 사건이 발생한다.
둘째 딸의 방에서 우연히 잠든 첫째 딸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그 날의 알리바이를 추적해가던 과정에서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그가 둘째 딸의 아버지이자 살해범이라고 생각한 교수는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탐정클럽의 의견은 다르다. 첫째 딸을, 그리고 교수의 제자를 죽인 것도 모두 둘째 딸이라는 것.
둘째 딸에게는 남모를 비밀이 많았다. 하나는 교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뒤늦게 집안에 들어온 첫째 딸이자 아버지의 친딸에게 깊은 질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의 조교는 둘째 딸에게 또다른 눈엣가시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의 남자친구와 함께 일을 꾸미게 된다.
아버지인 교수에게 이 모든 일은 믿을 수 없는 동기이자 행동이지만, 둘째 딸은 자신이 행한 결과에 깊은 만족을 느끼며 잠든다.
줄거리를 보다시피, <장미와 나이프>에 담긴 단편선은 모두 클래식에 가까운 추리소설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용의자들이 드러나며, 이 와중에 갑자기 등장한 탐정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가며 범인을 밝히는 방식이다.
어쩌면 기본에 충실한 내용이기에 만족스러울 수 있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들을 접한 독자로선 다소 실망스러웠다.
서사가 짧은 만큼 독자에게 주어지는 힌트가 적어서, 갑작스럽게 쨔잔- 하고 탐정이 결과를 들고 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한 번 펴면 덮을 수 없도록 사건의 실타래를 요리조리 풀어가는 장편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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