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책테기(책+권태기)가 계속되던 시기
새롭게 읽어볼 만한 책 없을까 방황하던 중, 제목처럼 싱그러운 표지를 가진 책,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마주했다.
계기는 위에 적은 그대로다. 그냥 예뻐서, 책 표지가 여름과 잘 어울려서.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시점, 나의 감상은 처음처럼 간단명료하지 않다.
단순하게 성장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왜 세상은 무지한 자들에게 이렇게까지 무자비한가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책의 줄거리는 초여름에서 여름, 그리고 초가을을 맞이하는 것처럼
주인공 채리티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아가기 시작하고 열렬히 빠져들고 말지만, 결국 현실 앞에 사그라들고마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서사는 어쩌면 평범해보일지도 모르겠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알 것 같은 작은 마을, 노스도어에 사는 채리티는 늘 지루해하며 작은 도서관의 사서로 푼돈을 모으며 이 곳을 떠날 날만을 고대한다.
그러던 중 해처드 부인의 사촌 하니가 마을에 방문하던 중 우연히 도서관에 들르게 되는데,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없이 단순히 시간만 떼우고 있던 채리티에게 하니는 책을 조금 더 소중히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괜시리 정곡이 찔린 채리티는 하니에게 수치심을 느끼지만, 되돌아보면 잘보이고 싶었던 멋진 남자에게 지적당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날부터 채리티의 마음에는 하니가 자리하게 되고,
건축가였던 하니는 마을의 고택을 둘러보고 싶다는 이유로 말을 빌리기 위해 로열(채리티의 후견인)의 집에 드나들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며 초여름같은 풋풋한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시련이 존재한다.
첫째, 채리티에게 로열 씨는 단순한 후견인이 아니었다. 그에게 부인이 있을 무렵엔 분명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지만, 병사로 부인이 사망한 이후 그는 채리티에게 외롭다는 고백과 함께 여자로서 자신과 함께해줄 것을 고백한다. 즉, 로열 씨는 미래의 부인으로서 채리티를 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둘째, 도시에서 온 하니에게 시골에서만 자란, 특히 '산'에서 온 아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리티는 그의 지식과 경험, 재력과 비교해 부족한 점이 많은 순박한 아가씨였다. 한 계절의 사랑을 나누기에 채리티가 가진 순박함과 청초한 아름다움은 충분했지만, 평생의 앞날을 기약하기엔 찰나의 요소에 불과했던 것이다.
* 노스도어 사람들에게 '산'이란 문명과 동떨어진, 짐승과도 같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산 출신'이라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한 번 불붙기 시작한 청춘의 사랑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채리티는 하니와 함께 한여름밤의 꿈처럼 마을 축제에서 근사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급기야 마을과 산 중턱에 있는 폐가에 그들만의 안식처를 마련해두고 밀정을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이 순탄했냐고 묻는다면, 채리티에겐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꿈만 같았던 마을 축제에선 급작스럽게 줄리아 호스, 그리고 로열 일행을 만나 '갈보같은 년'이라며 욕을 먹기도 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이고 싶었던 노스도어 마을 축제에선 하니 옆에 부잣집 아가씨, 에나벨 볼치가 앉아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을 축제가 끝난 뒤, 채리티에겐 뜨거웠던 여름날과 달리 차가운 결실만이 남게 된다.
하니는 잠시 해결해야할 일이 있다고 노스도어를 떠나지만, 그것은 에나벨 볼치양과의 혼인임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렇게 떠나보낸 그의 아이가 자신의 뱃 속에서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말해야 하는가, 채리티는 고민에 빠지지만 그에게 '옳은 일을 하라'고 편지를 쓴다.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부부가 된 이들의 불행한 서사를 보면서, 자신이 하니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아닌지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 없는 아이를 갖게 된 채리티는 마을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에 노스도어를 떠나 '산'으로 향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일정 기간 자신을 키웠듯, 자신도 산 출신이라는 동질감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이미 문명 속에서, 그리고 안락한 자본가의 집에서 성장해온 채리티에게 산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렇게 산을 떠나 다시 떠돌려던 채리티에게 남은 선택지는 로열 씨뿐이다.
채리티를 돌봐주겠다는 로열씨마저 그에게 아내가 되어줄 것을 간청하지만, 사실 간청처럼 들리는 그럴 듯한 말이지...
집도 절도 없이 아이를 밴 채리티에게 과연 그것이 간청일까, 아니면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협박일까.
결국 채리티는 로열 부인이 되어 노스도어로 돌아가고, 하니에게 '나는 로열 씨와 결혼했어.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게"라는 편지를 끝으로 남긴다.
인생 그 어느 때보다 긴 여름을 보낸 채리티는 마을을 떠나고 싶었던 소녀에서, 주어진 한계를 받아들이는 여성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것을 성장이라고 봐야 할까? 나는 이것을 한 여성의 좌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채리티에게 집은 처음부터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아버지라고 믿으며 자라온 후견인에게 아내가 되어달라는 청을 들은 순간부터, 그녀에게 집은 나를 지켜야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 뻘의 로열과 채리티보다, 하니와의 사랑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그녀의 삶이 로열의 소유물인 것처럼 함부러 그녀의 몸가짐을 욕보이고, 급기야 그들의 밀회 장소로 찾아가 망신을 준다.
로열은 그것이 결혼을 약속하지도 못할 거면서 채리티를 흔들어놓기만 하는 난봉꾼을 떼어놓는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글쎄, 자신과 하니의 앞에 놓인 한계를 인정하고 옳은 일을 하라는 채리티의 태도를 보면 그가 나서지 않아도 해결될 일이었다.
그리고 갈 곳을 잃은 채리티 앞에 나타난 키다리 아저씨의 역할까진 좋았지만
'로열 부인이 되어 돌아간다'는 말은 그녀에게 더이상 선택지가 아닌, 억지로 쥐어준 종착지 같은 것이었따.
나는 그의 태도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보다, 나보다 약한 자를 굴복시키는 자본가의 모습을 먼저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시골에서 배운 것없이 자라, 자신의 능력으로 자본 한 번 키워보지 못하고 결국 원초적 본능인 사랑마저 잃어버리는...
무지한 자에게 주어진 무자비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여름은 한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볕이었다기보단, 너무 뜨거워서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땡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요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채리티의 모습이 고요한 물 속으로 침잠해버리는 존재같아서 책을 덮은 그 날 내내 심란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아름다운 문체로 여름날의 시골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계절에 딱 맞는 소설이지만
마음 한 켠이 시려온다는 점에선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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